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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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잠만 많아졌다. 낮잠도 자고 12시간씩 자고 또 자고 그래도 졸려.. 춘곤증인가.. zzz Dr.sung이라 불러주라고 했더는 나를 sunshine이라고 불러주는 나이 많은 아저씨가
면허시험 통과 축하한다고 밖에 나가면 필요할거라고 바리바리 챙겨줬다. ㅋㅋ 빛나는 오늘 - 요조 하루는 내 동생과 한 이불속에서 밤이 새도록 수다를 떨었다. 당시 그녀는 고3 이었고 나는 스물일곱. 8살 터울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나이차이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수학 성적이 좋아서 이과를 선택한 수현이는 고3이 되었지만 한달인가 지나서 갑자기 사진을 공부하고 싶다고 부모님 속을 엄청 썩이고 결국 사진기를 손에 쥔지 4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다. '중앙대에 가고 싶어 언니, 근데 사진과는 서울캠퍼스가 아니고 지방에 있어서 집에서 통학하기 쉽지 않을텐데 어쩌지?' '그럼 나랑 둘이 따로 나와서 살자. 언니가 얼른 앨범내고 돈 벌고 차 뽑아서 데려다줄게.' '내가 언니랑 따로 산다고 하면 엄마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걱정마, 너 사진 공부 하는 것도 내가 우겨서 허락받은건데... 어디쯤에 집을 구하면 니가 학교 다니기에도 내가 홍대 가기에도 편할까?' 다음날 동생은 청량리역으로 사진을 찍으러 다녀오겠다고 말했고 난 만원인가를 쥐어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녀는 청량리역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내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내가 계란 흰자를 좋아하고 그녀는 계란 노른자를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아니면 나는 닭가슴살을, 그녀는 닭다리를 좋아해서 치킨을 한마리 시켜도 사이좋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엄마가 밥먹으래'라는 한마디가 하루 중 우리의 유일한 대화일 때도 많았고 내 옷을 말없이 가져가는 것에 미칠듯이 분노하며 엄마가 내 동생을 혼내는 날엔 나 역시 엄마편을 주로 들곤했지만 나에게는 역시 내 동생 뿐이었다. 청량리역에서 사진을 찍던 동생은 이유없이 포크레인에 깔려 즉사했다. 병원에는 경찰도 오고, 포크레인 회사 사람, 철도청 사람, 방송국, 신문 기자들이 왔다. 3일이면 충분한 장례식장에 11일을 머물렀다. 너무나 힘들었다. 하지만 나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것은 엄마가 했던 말이었다. 사진공부를 시키지 않았다면 수현이는 죽지 않았을거야. 밤이 오면 옥상에 올라가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녀가 죽기 바로 전 날, 새벽까지 우리가 그렸던 내일이 난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중앙대에 갈 수 없고, 사당 근처에서 같이 살 수도 없고 내가 돈을 벌고 차를 뽑아도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했다. 엄마는 매일 아침 밥을 지어야 했고 아버지는 매일 아침 출근을 했다. 나는 바로 제주도에서 공연이 생겨 웃는 얼굴로 <바나나 파티>를 불러야 했다.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나는 계속 '내일'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 내게 '내일은 뭐해?' 하고 물어오면 '내일? 내가 어떻게 알아. 바로 죽어버릴 수도 있는데.' 하고 이야기했다. 동생을 잃고 나서 얼마간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관론자가 되었다. 죽음은 이제 더이상 나에게 쪼글쪼글 할매가 되어서야 맞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바로 코앞에서 나를 언제나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두렵지도 않았고, 늘 내일 죽을 사람처럼 굴었다. 수중에 있는 돈은 그냥 다 써버렸고, 살찔까봐 조심스러워했던 식성도 과격해졌다. 술도 퍼마시고 담배도 피워댔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내일'이라는 것을. 동생뿐이었던 내게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홀랑 데려가버렸던 신의 의도를. 죽기전에 우리가 보낸 새벽을. 그녀의 죽음을. 사진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거라는 엄마의 절규를. 그녀의 죽음을 통해 나는 무언가를 깨달아야했고 그걸로 내 삶이 변화해야 했다. 깨닫지 않고서는 그녀의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일년 반 정도가 지났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 동생의 죽음의 교훈을 알아 내었다. 그 교훈은 민망할 정도로 너무나 당연해 모두가 간과하고 있던 시시한 진실. 그것은 바로 '빛나는 오늘의 발견'이고 '빛나는 오늘의 나' 였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가 내 동생을 잃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오늘에 충실하는 것. 이것이 여러분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다. 나는 여러분이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고문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여러분이 오늘 먹고 싶은 음식을 먹기를 바라고, 너무 입고 싶어 눈에 밟히는 그 옷을 꼭 사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분이 늘 보고 싶지만 일상에 쫓겨 '다음에 보지 뭐' 하고 넘기곤 하는 그 사람을 바로 오늘 꼭 만나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분이 100만원을 벌면 80만원을 저금하지 않고 50만원만 저금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고 싶은 옷을 참고 먹고 싶은 음식을 참으며 만나고 싶은 사람을 다음으로 미루는 당신의 오늘에 다 써버리기를 바란다. 나는 당신이 사진을 찍을 때 행복하기를 바란다. 나는 당신이 그림을 그릴 때 행복하길 바라고, 당신이 무대위에서 대사를 읊조리고 동선을 고민할 때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 사진이 사람들의 호응을 살지, 이 그림이 얼마나 비싸게 팔릴지, 당신의 연기를 사람들이 좋게 봐줄지를 고려하기보다 그저 당신이 원해왔던 행위를 하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행복을 더 우선했으면 한다. 내일 죽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당신의 오늘이 완성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오늘 노래하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고, 오늘 수중에 돈이 없을때면 맛있는 라면을 먹고 돈이 많을 때 내가 좋아하는 봉골레 스파게티를 먹는게 행복하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거나하게 취하고 다음날 눈을 떠 조금 창피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 행복하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2009년 5월 22일 뮤지션으로 살아있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 '사진공부를 시키지 않았다면 수현이는 죽지 않았을 거야' 하고 이야기했던 엄마는 조금 틀린 것 같다. 수현이는 그 날, 행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원했던 사진을 그 날도 찍을 수 있어서, 찍고 싶었던 청량리역을 찍고 있어서, 내가 쥐어준 만원으로 맛있는 밥을 먹어서 행복했을 것이다. 얼마전 차안에서 그냥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인용하는 것을 듣고 나는 엉엉 울었다. 이제야 이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며 흘린 눈물이었다. 나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내일 모레 공연을 위해 오늘 합주를 할 것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 나는 당신의 오늘이 행복하길 바란다. 당신의 내일같은 건 관심도 없다. 요조 - 좋아해 (feat.김진표) 법원에 부모님뿐만이 아닌 선생님을 소환해서 호되게 야단치고
처벌보다는 치유를 통곡의 반성의 눈물을 흘리는 가해자/피해자를 보면서 눈물을 속으로 삼키며 법의 엄중함을 알리시는 천종호 변호사님 이런 분들이 많이 계셔야 공권력 무서운줄도 알고 법이 무서워야 사회가 제대로 설 수 있는데 100억 횡령하면 10억 내면 풀려나고 성폭행 하면 1년 징역이면 풀려나고 한국의 솜방망이 법원판결을 보면서 도덕성 가치가 헤이해진 이 사회에 양심이 무엇이고 도덕이 무엇인가 가르쳐 주시는 그런 줏대와 잣대가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싶습니다.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으로 유교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집은
아니 사실 우리나라 '성'씨는 본이 하나밖에 없는 창녕성씨이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성씨들은 같은 성씨끼리 유대감이 강하고 대대손손 전형적인 양반가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부귀영화보다는 배움을 더 으뜸으로 여기고 사치보다는 검소함을, 물질보다는 명예를 더 가치있게 여기는 가풍덕에 나도 어려서부터 부모님한테 가장 많이 들어왔던 말이 너는 성삼문의 충효심과 성춘향의 절개를 이어 받은 양반의 후손이기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나라에 충성하고 한 배우자를 만나서 가정을 만들어서 효를 다하고 지조를 지키고 늘 행실이 바르게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서 그 가르침중에는 남의 잔치집에 가면 양반은 먹을거를 탐내면 안된다고 친구들 생일집에 보내기 전에 항상 먼저 집에서 식사를 하고 보내고, 아침에 간단하게 콘프레이크와 빵 먹고 싶은데 아침에는 항상 밥 먹어야 된다기에 빵 먹을려면 먼저 밥 한공기 먼저 먹고 빵과 콘프레이크를 먹고, 모든 친척들 제사/시제 등 집안 행사 따라다니기, 남의 집에서 절대 외박하지 않기, 어른보다 수저 먼저 들지 않기, 사람이나 이불 위로 넘어다니지 않기, 손윗사람에게 먼저 인사하기 등등 사소한것들 하나하나 어려서 부터 예의범절을 철저히 배워왔다. 최근에 '아빠 어디가'를 보면서 성동일 아저씨나 성준이나 내가 받았던 가르침과 울 집안 어르신하고 너무나 생각이 비슷해서 픽 하고 웃음이 낫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아이면 어린아이답게 실수도 하고 때쓰기도 하고 하는게 당연한데 어렸을때 부터 양반적인(?) 마인드가 강한 나는 늘 또래애들 보다 어른답게 행동할려고 했기에 늘 칭찬을 들었는데 어렸을적 기억에는 그런게 굉장히 곤욕이고 스트레스 였다. 먹고싶을때는 먹고 투정부리고 싶으면 투정부리고 마치 '준수'처럼 그렇게 애는 애 답게 커야하는데 늘 어린마음에도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억압시키고 스스로의 욕망을 뒤로하고 나의 모든 행실은 부모님을 명예롭게 하기도 부모님을 욕먹힌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아주 어린나이에도 철이 들어있었다. 사람마다 정도가 다르겠지만 나는 그런 사대부정신이 철저해서 늘 나의 행복보다는 명예를, 돌려말하자면 남의 시선에 더 신경을 썻기에 내 자신의 만족감 보다는 타인의 시선에 늘 잣대를 대고 살아가다보니 내 스스로가 행복하다는 감정이 굉장히 낮설고 어색하다. 특히나 유학와서 늘 부모님께 죄송하고 함께 하지 못해서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맛있는걸 먹어도 죄송스럽고 즐거운 일이 있어도 함께 하지 못해 죄송스럽고 혼자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냐 라는 미안한 마음이 앞서서 행복한 순간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그런 순간순간이 쌓이다 보니까 어느 순간 행복함이라는 감정이 너무 낮설어 졌다. 좋게 말하자면 배려심이 투철한거고 나쁘게 말하자면 줏대없이 유유부단하다는 건데 행복해야 할때 행복하지 못하는 지금.. 이제는 누군가를 만나서 행복하게 해줘야 하는데 행복이란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지금.. 티비를 보다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지금 나는 사춘기가 다시 찾아왔구나 라고 느꼇다. 보름달이 나보고
- 허동인 - 보름달이 나보고 환하고 밝게 할려거든 둥근 마음 가지라 합니다. 둥근 마음 가지려거든 환하고 밝게 살아라 합니다. |
HS SungArchives
February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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