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기(부여다사랑병원장/정신과전문의/[무엇이 당신을 일하게 만드는가]저자)
정신과 의사는 사람들의 말을 많이 들어드려야 하는 직업이다. 레지던트 때는 환자의 무의식에 대해서 이해하고 환자의 무의식을 의식차원으로 이끌어내서 언어로 표현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는 것은 무의식 이전에 이미 환자가 의식하고 있는 것을 편하게 말하게 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의식차원의 소재를 환자가 마음 편하게 이야기하고, 의사에게 이야기를 한 후 잘 얘기했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깨닫게 된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말하기 편한 사람이 있고, 말하기 불편한 사람이 있다. 환자가 정신과 의사를 만나도 마찬가지다. 어떤 정신과의사에게는 왠지 내가 왜 이런 얘기까지 하고 있지 하는 느낌이 들게끔 편하게 말을 하게 되는데, 어떤 정신과 의사 앞에 서면 자꾸 사실을 감추게 된다. 처음에 레지던트 때는 환자들은 의사 앞에서 무조건 있는 그대로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의사 앞이더라도 환자들도 숨기고 싶은 것도 있고, 말하기 싫은 것도 당연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주위 사람들에게 표현하기 힘든 자신의 감정과 비밀스러운 측면을 말해준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내가 진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상대라고 환자들이 인정해주는 것이니까.
살다가 보면 어떤 사람에게 용기를 내서 마음을 드러냈다가 실망만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어려움을 말하고 위로를 받고 싶었는데, 오히려 왜 그 따위로 일을 처리하냐고 야단을 맞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는 앞으로도 점점 진실을 감추게 될 것이다. 학내에서 따돌림을 받거나, 같은 학교 학생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경우, 부모가 나중에 알고서 아이에게 왜 이제서야 이야기를 하느냐고 말하는 수가 있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의 경험을 비추었을 때 부모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애정과 관심이 아닌, 부모가 원하는 형태의 애정과 관심만이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감추게 되는 것이다.
의사들은 중고등학교, 의과대학 동안에 지적인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타입인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환자들의 상황을 질환이라는 과학적, 이성적 측면에서만 접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환자들이 자세한 설명, 지식의 전달에 못지 않게 원하는 것이 감성적인 공감이다.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걱정이 되는 지에 대해 사소하더라도 적절하게 감정적인 표현을 해주면 환자들에게는 많은 위안이 된다. 의사들뿐 아니라,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취약한 것이 이러한 감정적인 공감이다. 사실 진실을 말하고, 듣고, 받아들이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이러한 감정적인 공감이다.
우리는 진실을 말해달라고 자식에게, 부모에게, 직장상사에게, 부하직원에게, 사회에, 대통령에게, 교수님께 요구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토록 남의 진실을 듣기를 원하건만, 상대방이 말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취약하다. 남의 진실을 들은 것에 대한 답례로 나의 진실을 말하는 경우도 많이 없다. 우리는 남의 진실을 수집하고 착취하려고 하지만, 나의 진실을 드러내는데는 조심스럽다. 감정이 섞인 인생의 진실은 일방적으로 나에게만 유리하게 수집할 수가 없다. 나의 진실을 줄 때, 타인도 그에 버금가는 그의 진실을 내게 준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에 대한 좋은 예가 일본 영화 [사토라레]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의 속마음이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사람들은 사토라레가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진실을 접하게 되었을 때 당황한다. 자신이 느낀 것을 마음대로 전파하는 능력을 가진 사토라레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엄청난 사람과 자원이 동원된다.
어슐러 K. 르귄의 소설 [어둠의 왼손]에 보면, 우주의 인류가 나중에 진화를 해서, 서로가 말로 대화하지 않고 마음으로 대화를 하는 단계에 진입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우리는 지금 결혼을 하면 서로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다. 미래사회에서는 결혼을 하게 되면 부부끼리는 서로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게 절차를 밟으면 되는 것이다. 내 마음 속 생각을 상대방이 알게 되니까 거짓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가 신뢰하는 커뮤니티에 들어가게 되면 그 때는 커뮤니티의 구성원은 말을 통하지 않고 마음으로 서로 대화를 하게 된다. 거짓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터넷이 의사소통과정을 촉진시켜 생산성 증가를 비약적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만약에 모든 인류가 진실만을 서로 말하고, 진실만을 서로 듣게 된다면, 그래서 거짓이 없는 세상이 온다면 이 세상의 죄악과 범죄 중 많은 부분이 사라질 것이다. 단 내가 듣고 싶지 않고, 내가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면 말이다.
과거에 임금님귀가 당나귀라는 것을 알게 된 이발사가 비밀을 끝까지 간직하지 못하고 입 밖에 내는 것을 어렸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역사를 배우면서 비밀이 탄로가 나서 모반이 미리 알려져서 반란이 실패하는 것도 어렸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사람들에게는 진실을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은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든 거짓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밝혀지는 이전 정권의 비리도 그러하다. 당사자들은 서로 함구하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 퍼지고 퍼지다가 보면 영원한 비밀이라는 것이 없게 되고, 소문이 나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타인에게 진실을 말하고, 타인의 진실을 들어야지만 숨기고 싶은 나를 드러내고, 피하고 싶은 나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숨기고 싶은 상처가 있다. 젊었을 때 한 때 거식증에 걸린 여성은 그 누구에게도 그 상처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 매일 맞고 사는 여인은 자식에게도 자신이 구타당하는 사실을 감추고 싶다. 알코올중독인 아버지를 둔 아들은 결혼하기 전 그 사실에 대해서 배우자에게 드러내야 할 지 감추어야 할 지 고민이다. 인생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러한 비밀을 어떤 형태로던 남에게 이야기하고,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대상을 선택해서 도움을 청해야 한다. 정신과 의사를 하다가 보니 나도 모르고 환자도 모르는 무의식의 세계를 탐색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환자에게 용기를 주면서 숨기고 싶은 자신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자신은 알아채지 못하지만 남들의 눈에는 훤히 보이는 나쁜 태도도 있다. 자신이 게으름 피우는 것은 모르면서 항상 남들이 너무 자신을 가혹하게 대한다고 투덜댄다. 일이 잘못되면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사람도 있다. 항상 거드름을 피우면서도 자신이 잘난체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사소한 일에도 화만 내면서 자신은 굉장히 착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이들도 있다. 그 사람이 남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지는지 진실되게 이야기하면 "뭐 이 따위 사람이 다 있어." 하면서 무시한다. 하지만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비추어지는지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의 대인관계는 악순환을 계속한다. 상대방이 어떤 태도를 보이건 일관되게 긍정적인 반응을 해줌으로써 그에게 새로운 대인관계를 경험하게 해주는 것도 정신과 의사의 중요한 역활 중 하나다.
이렇게 숨기고 싶은 나, 피하고 싶은 나와 관련된 정신과 용어가 있다. 조하리의 창 (Johari Window) 이라는 용어가 그것이다. Joseph Luft 와 Harry Ingham 가 1969년에 발표했는데 이름의 앞 부분을 따서 Johari 라고 한 것이다. Johari Window 는 다음 네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1 분면: 공개자아 (나도 알고 남도 안다.)
2 분면: 눈 먼 자아 (나는 모르지만 남은 안다.)
3 분면: 은폐자아 (나는 알지만 남은 모른다.)
4 분면: 미지자아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른다.)
남에게 감추고 싶은 어렸을 적 상처는 3분면에 해당이 된다. 남들에게는 숨기고 싶은 가족의 비밀도 3분면에 해당이 된다. 나는 알지만 남은 몰랐으면 한다. 은폐하고 싶은 마음 속 한 부분이다.
반면에 자신은 모르지만 남들에게 보이는 측면은 2분면 눈 먼 자아에 해당이 된다. 대기업에서 인터뷰를 할 때 잘 쓰는 질문이 있다. 남들이 자신에 대해서 잘못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말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지원자는 사실 자신은 마음속으로 부드러운데 남들은 강한 사람으로 안다고 한다. 어떤 지원자는 자신이 겉으로 보면 유약해보이지만 강인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고 한다. 즉 남들에게 지속적으로 지적을 받아도 자기 자신만 인정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눈 먼 자아에 해당이 된다.
은폐자아, 눈 먼 자아에 대해서 자각이 늘어날 때 자신의 삶을 자신이 통제하게 된다. 운명에 휘말린다는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서 현재 자신도 모르고 남들도 모르는 미지의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미지의 능력을 통해서 내가 상상치도 못한 넓은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게 된다.
그런데 은폐 자아와 눈먼 자아를 깨닫기 위해서는 피드백이 중요하다. 피드백을 통해서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자기 이해와 자기 수용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고, 자신을 사회에 주장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개인의 성장이 이루어진다. 정신과에서는 자기를 수용하고,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를 드러 내고, 자기를 주장하는 것을 목표로 집단치료를 행하기도 한다.
집단치료에서 가장 흔히 접하게 되는 개념으로 공적존중감과 자아존중감이 있다. 공적존중감은 집단이 그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가치있다고 인정해주는지와 관련된다. 자아존중감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지와 관련이 된다. 집단치료를 할 때 자기 자신은 잘났다고 생각하고 자기 멋대로 하려고 하는데, 다른 집단 참가자들은 그 사람에 대해서 아주 낮게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자아존중감이 공적존중감에 비해서 과도하게 높은 경우다. 따라서 자신이라는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 같이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그 집단을 떠나게 된다. 특히나 치료집단에서의 그 인간의 가치는 세상의 가치와는 약간 다르다. 예를 들어서 의사, 변호사라고 하면 실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한 수 접고 들어간다. 환자나 의뢰인은 의사나 변호사에게 잘 보여야 하기 때문에 그렇고, 증권회사 직원이나 세일즈를 하는 사람들은 주요고객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대접만 받고 살던 이들은 치료집단에 들어와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당연히 특별대접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많이 어색해진다. 사실은 이러한 어색함이 치료집단의 가장 커다란 힘 중 하나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객관적으로 괜찮은 사람인데 자기 자신은 못났다고 생각을 한다. 집단원들이 칭찬을 하면 할수록 그사람은 더욱 겸손해진다. 예를 들어서 결혼이 늦은 평범한 여자 회사원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녀는 집단원들 중 좋은 사회적 배경을 지닌 이들에게 주눅이 들어있다. 하지만 남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건 귀기울여 주고, 누군가 슬픈 이야기를 할 때 참 안 되었다고 맞장구도 쳐준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보잘 것 없이 여기지만, 집단에서는 점점 중요한 사람이 된다. 이런 경우는 공적존중감이 자아존중감보다 더 높은 경우다. 이 여성은 나 자신이 생각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자아존중감을 끌어 올려지면서 공적존중감과 균형을 맞추게 된다.
얼마 전에 패션 디자이너 지망생들이 참가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봤다. 문외한이 내가 보기에도 부적절한 디자인을 한 이들이 왜 자신이 떨어졌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심사위원을 원망하는 대목이 있었다. 자아존중감이 공적존중감을 완전히 넘어선 예인 것 같이 보였다. 자기 자신의 개성과 열정을 심사위원들이 이해 못한다는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나름대로 최선의 충고를 하고, 격려를 한 후에 탈락을 결정하자, 어차피 탈락시킬건데 왜 그렇게 좋은 말을 해줬는지 이해가 안간다고 도리어 화를 내는 참가자도 있었다.
언젠가부터 자기가 진정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서 꾸준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다소 무책임하듯이 느껴진 때가 있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이 반복적인 육체적 노동을 실수 없이 하는 것인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살리기 위해서 공장에 들어가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일해야 하는 것인가? 세상에는 내가 잘하지만 지겨운 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젊은이들이 재미 있어 하는 일은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주관적인 판단이 중요한 부분이다. 예술, 맛, 패션, 노래 등은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았을 때, 즉 공적존중감이 자아존중감보다 현저히 낮은 경우에 부정하기가 더 쉽다. 내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루한 기성관념에 의해서 자신이 피해를 당한다고 생각하면서 꿈만 쫓고 사는 이들이 있다.
우리 사회의 한 쪽에는 이렇게 과도한 주관성에 몰두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그 반대쪽에는 공적존중감을 획득하는데 목을 메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모든 관심은 1억 모으기, 3억 모으기, 10억 모으기에 가 있다. 의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에 가기 위해서 고시생처럼 살아간다.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서 대학생활도 학점따기, 영어실력쌓기에 몰두한다.
우리 사회가 조금만 더 균형잡힌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공부 못하고 돈이 없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러한 주류에서 밀려난 이들은 과도한 개성추구에 몰입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상황을 다양성, 창조성이라고 포장하는 것은 아닐까? 주류의 선두에 있는 이들도 세상의 인정과 상관없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성찰을 하고, 비주류에 속한 이들도 세상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노력해야 한다.
※ 2011년 1월 제가 허원미디어에서 출간한 [마음이 경영을 만나다] 中에서 발췌한 글입니다.